30대의 기록/일상기록

2022년 9월

생즙 2022. 10. 25. 21:51


그런 때가 있다. 장소나 상황 그리고 공기를 포함한 모든 타이밍들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들이 너무나 생생해져 현실감이 없어지는 지극히도 사적인 순간 말이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어떤 날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다. 밖은 어둑어둑했고 우리는 느릿느릿 이동하는 중이었다. 나는 가만히 노래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에 잠겨 있다가 운전 중인 남편에게 할 말이 생각나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봤다.

그런데 그의 모습 뒤로 뉘엿뉘엿 지는 석양에 어스름해진 하늘이 말갛게 물들여지고 있었다. 산 끝자락에서 보일락 말락 하는 햇빛이 반짝 거리고 있었고 그 아래 운전대를 잡은 나의 배우자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나지막한 그의 소리까지도 너무나 조화롭고 아름다웠던 날.



성경의 마가복음이라는 파트에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대화하는 장면이 꽤 등장한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 세 명과 기도를 하기 위해 산에 올라간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깨우며 한마디 하셨다.

시몬아 자느냐?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거라.
영은 원하지만 몸이 연약하구나.
<막 14:37-38>


9월 마지막 2주는 다니엘을 주제로 한 시간 특새 기간이었다. 특새란 특별 새벽예배의 줄임말인데 호기로운 마음과는 달리 새벽 기상은 매일이 고비였다. 겨우 몸을 일으켜 예배를 드려도 눈꺼풀이 어찌나 무겁던지. ㅠㅠ

평소엔 저 구절을 떠올릴 일이 없었는데 특새 기간 동안 내게 "얘야, 자니? 너 한시도 깨어 있을 수는 없는 거야?"라고 하시는 듯하여 좀 민망했다. 그래도 몸을 일으켜 예배에 참석 한 날은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있었고 하루를 단단히 무장하는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생일을 맞이하여 나름 성대하게 준비해봤다. 매년 그의 생일에 맞춰 준비한 것들을 들켜 김이 새곤 했는데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 생일 하루 전날 선물을 들킨 척해봤다. 일종의 연막 작전이었다. 그는 서프라이즈는 통하지 않는다며 낄낄 거리며 씻으러 갔다.

그가 씻으러 간 사이 나 역시 이번엔 성공을 확신했고 혼자 엄청 킬킬 웃어대며 아주 빠르게 현수막과 풍선 그리고 가랜더로 집 곳곳을 장식했다. 후다닥 준비한 보물찾기 카드들도 숨겼다. 그리고 0시 정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가장 먼저 축하하겠다는 열의를 다지며 말이다.

덕분에 생일 정각이 되자마자 도착한 나의 보물찾기 초대 카톡에 이번엔 정말 많이 놀란 그에게 나는 자신 있게 서프라이즈를 외쳤다


늦은 밤 그는 꽤나 즐거워하며 보물 찾기를 하러 돌아다녔다. 준비했던 나도 당사자인 그도 매우 행복했던 밤이었다. 글 쓰는 지금도 킥킥 웃으며 돌아다니던 그대 모습이 눈에 선하네 🥺



추석 연휴에는 엄마 아빠와 바다에 다녀왔다. 이번 여행 콘셉트는 두 분이서 준비한 코스에 맞춰 진행된 엄빠 표 패키지였다. 첫 번째 여행지는 우리와 같이 오고 싶었다는 맛집. 코다리 돌솥밥 시식을 시작으로 해변가를 따라 바닷길을 슬슬 걸어 다녔다.

경험 상 엄마 아빠가 리드하는 여행은 걷는 코스가 많다. 많은 장소를 소개해주고 맛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여행이라 언제나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다는 함정이 있다. 그래서 힘들기도 했지만 무척 즐거웠다. 부모님의 걸음은 바빴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여유라든지 근황이라든지 전화로는 전해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안부를 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바다낚시하는 사람들 옆에서 구경도 했다. 고기보다는 불가사리가 태반이었으나 노래를 들으며 라면을 먹는 모습이 어찌나 여유롭게 느껴졌는지 우리 일행에게도 그 여유로움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장 좋고 행복한 때는 집에서 쉬는 시간. 아무 일정이 없던 고대했던 어떤 주말 집콕을 했다.

차를 우려 책을 읽다가 뒹굴거리며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티비를 봤고 밥을 먹고 해를 쬐다 낮잠도 잤다. 행복했다.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자연이 선물해준 뷰를 즐길 수 있다니. 감사했다.



그리고 그의 근황. 인싸인 그는 골프장에도 다녀오고 세미나에 다녀왔다.


필드 가는 날은 대부분 스스로 알아서 챙겨서 나가는 편이긴 한데 막상 나의 보조(?)가 필요하기도 해서 나는 어미새 모드가 되어 준비물을 챙긴다. 새벽부터 같이 깨서 커피를 내리고 배웅을 해주는데 그의 표정이 소풍을 앞두고 해맑은 아이 같아서 준비에 꽤 보람이 있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