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기록/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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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즙 2013. 2. 3. 01:10

 

# 1.

 

H오빠의 소개로 같이 알바를 한지 2주가 넘었다. QA업무는 생각보다 단순한 것 같다. 개발자로 일하는 Y양과 P군이 회사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이 정도 스트레스는 꽤 무난한 것 같고, 다만 좀 업무가 꽤 단순한 편이라 약간 바보가 되가는 그런 느낌. 틈틈이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거나 짬내서 영어 듣기도 하고. 일이 없을 땐 오픽 대본을 쓰거나 그냥 멍도 때리고. 

 

 

 

 

# 2.

 

페이스북을 닫았다. 원래 거의 하지도 않았지만,

 

 

 

 

# 3.

 

피곤하게도 페루에 있는 시간동안 감성이 더 풍부해진거 같다. 조절하려고 노력하지만 눈물이 더 많아져서 큰일이다. 얼마전에는 J와 술을 마시다 펑펑 울었다. 페루에서는 감성이 풍부한 게 흉이 아닌데 우리 나라는 예술가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들 눈에 흉이 될 수도 있다. 가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몰려올때는 리마에 살던 집이 그렇게 그립다.

 

 

 

 

# 4.

 

 

매일매일 H오빠랑 일을 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주 오래 알았던건 아니지만 H 오빠는 내가 꽤나 존경하고 동경하기도 하던 분인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열등감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서 많이 놀랐다. 오빠랑 이야기를 하다가 "오빠. 기본만 하고 살려해도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보다 더 당차고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힘내요." 라고 했다.

 

 

 

# 5.

 

 

페루에 있는 K씨에게 연락이 왔다. 미애언니의 벌써 1년째 기일이 돌아왔다고 한다. 언니를 생각하니 너무 먹먹해져서 메일을 읽고 울고 싶었다. 내가 그 날 언니에게 까녜떼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언니는 아직 살아있을까? 언니는 내 이야기를 그렇게나 많이 했다는데 왜 난 언니 사고소식도 한참이 지나서 알았을까. 당연히 부모님의 품에, 그러니깐 한국에 돌아왔을줄 알았는데 언니에게는 부모님이 안 계신댄다. 이런저런 죄책감에 마음이 안 좋다. 나는. 지금도. 열심히 살자고 늘 다짐하던 언니 모습이 눈에 선한데.

 

 

 

# 6.

 

 

고맙게도 페루에서 만났던 깡 언니와 홍군과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언니는 페루에서의 하루하루를 내게 이야기해주고 사진도 보내주고 사소한 것 시시콜콜한것까지 다 이야기해준다. 자꾸만 속도가 빨라지는 내 삶속에서 매일매일 사랑한다라고 이야기해주는 언니는 진짜 고마운 사람이다.

 

 

신기하게도 홍과도 꾸준히 연락하고 종종 시간나면 같이 차도 마시고 페루에서처럼 수다를 떤다. 사실 난 혼자 있다가 이유 모를 멘붕의 쓰나미가 종종 몰려오는 편인데 그때마다 홍한데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말을 하면 바로바로 피드백이 와서 너무 좋다. 사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렇게 좋은 사람들 만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참 고마운 일이다.

 

 

 

 

# 7.

 

 

요즘 너무 바빠서 싼도르한테 연락을 못했더니만 에두에게서 싼도르가 내게 실망했다며 속상해한다는 말을 들었다.

 

 

 

 

# 8.

 

 

이런저런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엄마랑 준이랑 이터널선샤인을 봤다. 사실 오늘로써 이 영화만 세 번째로 봤는데, 나는 정말 이 감독이 표현하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다. 아마도 감독 미쉘씨는 좋은 슬프든 기억은 아파도 소중한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메리가 기억을 지운다는 걸 끔찍한 일이라고 표현한 거 보면.

 

 

 

 

 

# 9.

 

 

얼마전에 짝을 보다가 출연하신 여성 분이 '결혼하시면 일을 계속할껀가요?" 라는 질문에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학창시절부터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고 달리고 있는걸까요? 라고 대답했다. 정말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열심히 살아왔고 살고 있을꺼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을 그만 둔 엄마들도 있을꺼고 본인이 원해서 그만뒀을수도 있고. 하지만 모두 열심히 살아와서 오늘까지 가족들을 품으면서 사는게 엄마의 역할인데. 나는 가끔 아빠가 돈 안벌면 집안일이라도 잘 해야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참을 수가 없다.

 

 

 

 

# 10.

 

 

점심시간엔 회사의 여자분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는다. 다들 나보다 언니분들이라서 실제 결혼생활에 대한 금전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고부갈등, 집값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엄마의 역할로, 그리고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 만삭인 몸으로 일하시는 분도 있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평생 걱정만하며 살아야되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 11.

 

 

일 끝나고 학원 마치고 나오니 고등학교 친구이자 대학친구인 S양이 강남역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커피를 마셨는데 S가 너무 힘들다며 엉엉 울어서 결국 술을 마셨다. S에게 지금 힘든 이런 상황은 또다시 올테니 다음에 다시 이런 상황이 오면 이번보다는 좀 지헤롭게 대처하면 된다고 위로했다.  

 

 

 

 

# 12.

 

 

우리나라는 꿈이랑 목표에 미쳐있는 거 같다. 전 국민들이. 꿈이 없는건 창피한게 아닌데. 예전에 김수민이 내게 늘 이야기하던건데 나는 조금 나이가 드니깐 알겠다. 꿈 좀 없으면 어때. 목표 좀 없으면 어떻고. 굶어죽지 않는다면 따뜻한 집이 있다면 남보다 더 가지는게 무슨 소용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럴 수도 있는건데. 한국사회는 자꾸 목표 없는 사람을 패배자로 만든다. 적당한 긴장감은 필요하지만 사실 꿈 없이도 살 수 있는건데 말이지.

 

 

 

# 13.

 

 

한국에 오고나서 너무 좋은데 자꾸만 채워지지 않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감정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꾸만 엉뚱하게 술에 손이가는건가. 가끔은 내가 너무 우울해지면 겁이난다. 이런 내게 홍은 가끔 우울한 건 필요하지만 너무 그 감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술에 너무 의지하는 건 좋지 못한데 술을 마실때만큼은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문제다.

 

 

 

# 14.

 

 

아빠가 "딸, 아빠 이제 노인이 되서 언제 갈지 몰라. 좀 잘해." 라고 말하는데 화가 나서 "가는데는 순서 없으니 아빠야말로 저한테 좀 잘 해주세요." 라고 해버렸다. 난 정말 구제불능이다.  난 정말 종종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골라서 한다.

 

 

 

 

# 15.

 

 

언제부턴가 숨 쉬는 동안만큼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갑자기 죽더라도 죽는 순간에 후회하는 장면보단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