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u 인생의 한획/Peru 현지생활

D-9 감성잡담

생즙 2012. 11. 3. 14:32


*



한국으로 짐을 부쳤다. 어젠 하루 종일 짐을 싸고, 청소를 하고 물건을 보냈더니만 방이 텅 비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제 이 집, 페루에 있는 글 쓰는 이 곳 그니깐 이 내 방에서 잠을 자는 건 딱 8번밖에 안 남았다. 



그래도 2년을 살았는데, 보낼 짐이 많겠지 했는데 막상 정리를 해보니 짐이 없다. 옷가지들도 2년을 내내 입어서 다 헤지고 너덜너덜해져서 버리고 갈 옷들뿐이고, 처음에 올 때 가져왔던 밥솥과 내 손때가 잔뜩 묻은 스페인어를 공부했던 책들을 제외하곤 한국으로 보내는 순수 내 짐이 없다. 2년간 대체 어떻게 지낸거지?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아 페루. 오늘은 우체국 직원 아줌마와 대판 싸웠다. 나는 평화와 사랑을 전하러 온 봉사단원이지. 하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살지만 정말 오전엔 멘붕이 와서, 치사하게도 한국말로 화를 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융통성이고 형평성이고 없는 아줌마. 내 물건에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선물로 보낼 과자 유통기한 갖고 시비를 거는데, 진짜 화가 나서 화를 엄청 냈다. 불친절함에 원리원칙도 없고, 아무튼 스페인어로 화를 내다가 안 되니깐 멘붕 한국어가 막 나온다. 



뭐 결론은 아줌마는 꿈쩍도 안 하고, 2년간 나도 노하우가 생겨서 적당히 화내고 물건들 그대로 다시 담아서 다른 우체국으로 갔다. 새로운 곳은 아주머니가 참 친절하셨고, 다 좋았는데 일 처리하시는 속도가 얼마나 느리고 느리고 느리신지 우체국에 짐 보내는데 4시간이나 걸렸다. 우리 나라 우체국처럼 크기가 큰 것도 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바닥에 앉아서 박스에 테이프 붙이고 문서작성하고 ㅎㅎㅎ 



우체국에 가려고 집에서 나온 시간은 오전 10시 반이었는데, 짐을 부친 시간은 오후 7시였다. 

진심 한국에 가면 난 뭐든 감사하고 감사하며 잘 살 수 있을 꺼 같다. 




*



요즘엔 룻 아줌마랑 도란도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왠지 심심한 날은 아줌마 판자방에 가서 아줌마 침대에 드러누워서 아줌마랑 티비를 보기도 하고. 아줌마가 만나왔던 한국 사람들 이야기도 듣고. 아침엔 학원을 안 가니 아줌마랑 같이 커피 마시면서 오래오래 수다도 떨고. 문을 열고 옥상에 가거나 부엌에 가면 항상 아줌마가 있어서 너무 좋다. 오늘같이 아줌마가 집으로 돌아가는 주말 밤은 특히 아줌마 생각이 참 많이 난다. 




동기들이 리마에 있어서, 같이 선물을 사러 다니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할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만 해도 사실 꽤나 어색했었고 알고보니 나는 언니들한테 좋은 이미지도 아니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 이렇게 웃으면서 "이랬었지" 라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아주 잘 지내며 언니들이랑 있는게 마음이 너무 편한걸 보면 분명 어떤 일은 시간이 해결해주는구나. 




*


 

나는 꾸미는 건 좀 별로여도 수첩에 필기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이나 눈 앞에 보이는 웃긴 상황이나 장면은 꼭 기억해야 적성에 풀리는 성격. 2년 전 들고 온 다이어리를 보니, 무슨 다이어트를 2년 내내하고 있어 ㅡㅡ 

난 정말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구나. 매일매일 초심으로 다이어트를 다짐하다니 ㅋㅋㅋㅋㅋㅋㅋ 



다이어리엔 예전에 현진이에게 쓰고 못 보낸 편지도 껴져 있었다. 학원이 끝나고 각자 출근 하기 전 잠깐 차 한잔 홀짝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이제는 하늘나라에 있는 M언니랑 했던 대화들을 조잘조잘 잘도 써놨다. 사진도 찍어서 보관해뒀고. 언니랑 했던 대화들 일부분을 써놓아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가슴이 철렁했다. 




*



오늘은 동기들과 소장님과 사무실 식구들 전체와 마지막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완전 마지막은 아니지만 소장님이 "그 동안 수고많았다." 라고 하며 악수를 해주셨다. 




*   



언니들이랑 2년 전 공항에서, 내가 엄마아빠한테 "아, 내 걱정 좀 그만하라구요! 나 혼자 잘 한다니깐?" 이러고 허세부리면서 엄청 썽 냈던걸 모두가 기억하고 있어서 다같이 택시타고 유숙소로 가다가 호탕하게 웃었다.ㅋㅋㅋㅋ

첫 날 집에 전화했을 때만 해도, 엄마가 내 방이 비었다며 울먹거리며 전화했었는데...옛일이 되었고만? 




*


 

오후엔 동기들과 함께 싼도르를 만났다. 



오늘은 싼도르에게 고맙다고 했다. 진지하게 말하기 쑥쓰러워서 못 알아 듣게 한국어로

"말 더듬는 동양 외국인 놀아주고,  넌 참 착하구나 싼도르야." 라고 한국말로 말 했더니만 싼도르가 느닷없이 "네~" 라고 해서

길 한복판에서 크게 웃었다. 탄력받은 싼도르는 갑자기 "내 이름은 싼도르. 잘 지내유~?" 라고 말해서 진짜 길에서 웃다가 장파열되는 줄 알았다. 




*



어제는 미래와 통화를 했다. 오랫만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미래가 말한다. 

"야, 우리 엄마가 널 그렇게 보고싶어해!" 

내 생일이면 케이크도 사셔서 집에 초대해주시고 주말엔 아주머니랑 같이 등산도 가고 막걸리도 마시고 그랬었는데.



나도 아주머니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