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는 일시의 광기이다.
그대가 분노를 제압하지못하면
분노가 그대를 제압한다. - 호라티우스
회사일로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 편인데 며칠 전에 생겼던 한 사건 때문에 목금토일 그리고 월요일까지 마음이 내내 지옥이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자꾸 모욕감이 느껴졌고 땀이 날 때까지 뛰어보기도 하고 매운 음식도 먹어보고, 잠도 자고 영화를 봐도 이 분노라는 감정이 떨쳐지지 않아 괴로웠다.
사건은 저번주 목요일 고객사 D에서 모바일 관련 이슈가 크게 발생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난다고 다른 이슈가 생겼다. 조심스럽게 팀장님께 저녁 식사 후에 고객사 이슈 건으로 여쭤볼게 있다고 했고, 식사 겸 약주 한 잔 하시고 돌아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물어보셨다. 이슈사항을 보고하는데 술기운이 오르는 팀장님이 뜬금없이 모욕감을 주는 말들을 쏟아냈다.
일단 너무 화가 나서 뭐라 대꾸하고 싶었으나 너무 화가 나기도 하고 상대는 술이 취해있었다. 간신히 이성을 잡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수천번을 생각해도 잘못한게 하나도 없고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업무가 빵꾸가 나서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한적도 없고, 못 한다고 뻐팅긴적도 없다. 물론 업무로 인해 사수를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게 그분을 괴롭힌다면 당사자가 내게 할 이야기지 뜬금없이 그 분이 할 이야기가 아니다. 매번 술만 취하면 내 외모가 어떻다느니 왜 아직도 결혼을 안하냐 등의 말들을 쏟아내면서 주말만 되면 하나님 앞에 세상 신실한 척 한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명치가 너무 아팠다.
공적인 혹은 사적인 자리에서 어떻게든 나를 깔아 내리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럴때마다 사실 맘이 무척 상한다. 근데 매번 분노해봤자 내 손해니 이를 벗어나려면 스스로 똑똑하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보다 더 현명하고 당찬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동안 자꾸 화가 나서 씩씩댔는데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니 흥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2.
유년 시절의 날 키워주셨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임종도 장례식에도 가질 못했는데 이번에도 갈 수가 없다.. 요양원에서 지내시다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담담하게 들었지만 모두가 잠이 든 한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끅끅 울고 말았다. 까치랑 통화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꺽꺽 대며 울었다.
할머니랑 있었던 여러 기억들이 사진처럼 하나하나 이미지화 되서 떠올랐다. 바늘구멍에 실을 넣어드리던 시간, 할아버지 박카스를 사러 심부름 나가던 시간, 할머니한테 혼나고 반항심에 집 나갔는데 갈 곳 없어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있다 걸려서 더 혼이 났던 일, 밖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면 어둑어둑해질때 즈음 밥먹자며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날 찾아다니던 모습, 제발 그만 좀 뛰어다니고 쉬라며 타박하던 모습, 밥 먹다 에어로빅하다가 엄청 꾸지람 들었던 일, 할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천천히 퇴근하시길 바랬던 마음, 젓가락질 제대로 못하면 밥 못 먹는다 했던 엄포, 침대를 만든다며 장롱에서 이불 다 꺼내고 패션쇼라며 할머니 옷 다 꺼내서 늘어놓다 걸린 일, 생수통 모아서 할머니 몰래 비미장소 만들었던 일, 실컷 코골고 주무셨으면서 잔적 없다며 잡아떼던 할머니, 크리스마스 때 같이 갔던 교회, 살 노래지니 귤 좀 그만 먹으라고 날 타박하던 모습, 내가 아프자 식겁해서 내 손 잡고 같이 병원 갔던 날, 내 자전거 뒤에 타고 옆동네 오가던 일, 그리고 할머니가 무거워 끙끙댔던 내 온몸의 긴장과 기분 좋았던 바람,모르는 사람이 말 걸면 모른척 해야한다던 엄포, 그 엄포에도 모르는 아저씨의 호의에 속아 오토바이에 올라타다 걸려 엄청 혼났던 일, 특별한 날에 구워주셨던 조기구이, 귀뚜라미 보일러로 교체했던 날, 학교에서 분필을 훔쳐와 벽 여기저기 낙서를 해서 혼났던 일, 혼내는데에 대한 복수라며 애기들 분유를 훔쳐 먹었던 기억, 냉장고에 있던 마가린 몰래 먹던 기억, 김일성 사망을 뉴스로 들으며 저거 들으면 너가 이해하냐며 웃던 모습, 천국이 어떻게 생겼냐는 질문이 보여주셨던 유럽의 거리가 찍힌 사진, 흰머리 뽑아주던 시간, 도둑고양이들 몰래 키우다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 있는 이불로 덮어줬다 걸려서 혼난 일, 결국 그 고양이들 다 거둬준 할머니, 나 몰래 시장에 내다 팔아서 내가 자지러졌던 일, 다마고찌 잃어버렸다고 엉엉 우는 내 손 잡고 갔던 문방구, 초등학교 입학식 때 사주셨던 오렌지색 옷, 그날 나는 참 신나서 할머니께 내가 결혼할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야한다고 했었다. 어제 일처럼 너무 선한데 나는 30대가 되었고 결혼하는 모습은 보여드리지 못했다.
마음으로 추모하고 올해 가을엔 까치와 어린시절의 내가 자라온 동네에 가볼 생각이다. 동네에 가서 이젠 정말 마음에서도 보내드려야지. 고됬던 삶 부디 그 곳에선 아픔 없이 할아버지와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이모와 함께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