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퇴근하자마자 밤 10시 반 버스와 호텔을 예약하고 군산에 왔다. 충동적이었다.
군산은 나한테 좀 복잡한 곳이다. 그립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곳. 어린 나를 품었던 곳이자 기억도 추억도 많은 곳.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곳. 그럼에도 두 분의 임종을 지키지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겹겹히 덮여져 있는 곳.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깐 비록 두 분이 계신 곳은 모르지만 그 곳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기도 했고 이제 나도 그 짐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면 하는 내 나름의 목적을 갖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세안제만 챙겨서 바로 터미널에 갔다. 군산 버스터미널에는 새벽 1시 즈음에 도착했는데 버스에 타는 순간부터 내리던 시점까지 기분이 이상했다. 호텔은 터미널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는데 호텔에 들어가자 진짜 내가 여행을 왔구나 싶기도하고 신기해서 잠들기 전까지 바깥을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숙소 근처에서 간단히 브런치를 먹고 내가 자랐던 동네에 갔다. 길가에 종종 등장했던 기차는 이제 없는 것 같지만 기찻길은 그대로였다. 기찻길에서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는다며 귀를 대기도 하고 평행봉 놀이도 하고, 돌맹이를 집까지 들고 왔던 그런 기억들이 나서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22년만에 온 동네는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내가 입학했던 초등학교를 검색해서 근처를 한참을 배회한 끝에 나를 키웠던 집과 교회를 찾았다. 논이었던 곳은 도로와 높은 아파트로 바뀌어 있었고, 내가 뛰놀던 마당 넓던 집과 담장은 사라지고 교회로 바뀌어 있었다. 친구들과 놀던 골목과 자전거를 타던 길가의 뼈대는 그대로였지만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바뀌어있었고, 나 역시 알아볼 수 없게 많이 자랐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가 어딘지를 몰라서 이젠 교회가 된 그 곳의 구석에 서서 기도를 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부디 그 곳에서는 평안함만 가득하시길. 어렸을 땐 늘 내 결혼할 때까지 오레 살자고 했었는데, 이번에 같이 인사온 내 남편과 나도 앞으로도 행복하데 사는 모습 지켜봐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동네 구경을 하는데 어릴 때 놀던 골목들이 그대로 있어 좋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다. 아, 학교 앞에 미용실이 있길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다. 미용실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별일이 아닌데 지역 특유의 억양과 다정함에 왠지 자꾸 눈물이 날꺼 같았다.
이후 남편과 역사박물관과 근대미술관, 그리고 해양공원에 갔다. 역사박물관은 청동기 시대 때부터 정리가 되어있고, 공룡 발자국 화석과 청동기 시대 때의 발굴된 무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박물관 입장 전부터 흥미진진함이 더해졌다. 입장해보니 시대를 따라 쭉 올라가보니 3층에선 일제 강점기 당시를 재현하는 공연을 하고 있었다. 공연을 보고 독립의사 분들을 기리는 물품을 보고 내려오는데 세삼 대단하고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해양공원까지 갔는데 초등학교 때 글짓기 대회를 했던 곳들이라 또 신기하고 감회가 남달랐다.
그렇게 열심히 둘러보고 근처 횟집에서 활어회 정식을 먹었다. 회가 정말 크고 싱싱해서 우리 둘다 눈이 휘둥그래져서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이성당 베이커리에 갔는데 유명한 팥빵과 야채빵을 먹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엄청 길었다. 궁금해서 팥방2개와 야채빵 1개를 샀는데 팥빵을 한 입 먹고 나서,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다면 많이 샀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나선 선유도 섬에 갔다. 차로 버스터미널에서부터 대략 5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육지와 섬 그리고 섬과 섬을 도로로 연결해서 자동차로 섬 안까지 들어갈 수 있다. 사진을 보고 기대는 했는데 눈으로 보니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 남편과 같이 모래사장에 들어가 파도를 보고 조용히 바닷소리를 듣고 또 도란도란 이야기를 했다. 해가 지기 전에는 자전거를 대여해서 돌아다녔는데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같이 해지는 노을을 보면서 해변에서 자전거를 탔다. 어둑어둑해지는 때에 시내로 돌아와 차를 반납하고 바로 올라오는 버스를 탔다.
즐겁고 후련한 여행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억만을 안고 돌아갈 수 있는건 이번 여행에 동행해 준 남편의 덕이 크다. 내가 기억에만 의지해서 살았던 곳을 찾는데 싫은 소리 단 한 번 주지 않고, 땡볕에 동행해주고 옛날 에피소드들을 참을성있게 들어줬다. 그는 내가 이제는 지도에도 없는 곳을 단지 기억에만 의지해서 찾아내고, 구석에 가만히 서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짠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후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자랐고, 좋은 분들의 손에 걸쳐 지금의 내가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예쁘고 건강하게 잘 살아야겠다. 10년후 내가 오늘을 돌아봤을 때도 위로와 힐링이 되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도록.